배움에 끝이 있을까? Ⅰ
김풍배 칼럼

며칠 전 여든 넘어 글을 배우신 칠곡 할머니들의 시(詩)가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배우지 못하여 70여 년 동안 이름도 쓰지 못하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 시도 써서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일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숙집으로 이것저것 가지고 갈 준비물들을 챙기다가 무언가로 어머니와 입 다툼을 하던 중 무심히 튀어나온 한마디 “엄만 무식해서”
어머니가 그렇게 화를 내시고 슬피 우시던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엉엉 우시면서 “그래! 난 무식하다. 그래서 너라도 유식해지라고 공부시키는 거 아니냐?”
그때 난 ‘그까짓 무식하단 말이 무에 그리 서운한 말이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냥 지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때 당시 우리끼리 놀 때 ‘무식해서’란 말을 유행하는 예사말로 쓰고 있었기에 오히려 화를 내시는 어머니가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필자 나이 사십 중반에 모 지점장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과 말쑥하게 차려입으시고 귀티가 나는 어느 50대 정도 되시는 아주머니가 실랑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가 봤더니 여직원은 출금 전표에 본인이 직접 글씨를 쓰시라는 것이었고, 그 아주머니는 여직원보고 대신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직원 조회 시간에 돈을 인출하고도 본인은 인출 한 사실도 없고 전표에 쓴 글씨도 본인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여 금융기관이 패소하였으니 각별하게 조심하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기에 무어라고 말 못하고 그 아주머니를 지점장실로 불러 사정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아주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난 까막눈이어서 글씨를 쓸 줄 모르니 그럼 어떻게 하랴”라고 하셨습니다.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내 어머니로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솔방울을 따서 그걸 삼 십리 길을 서산 장에 머리에 이고 가서 팔아 내 학비를 대셨습니다. 손은 굴 껍데기처럼 터지고 두피는 벌겋게 부으셨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새벽에 화수리 진밭 모랭이에서 호랑이도 보셨단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날 가르치셨던 어머니는 필자가 철도 들기 전에 창창하신 나이 오십에 저세상으로 훌쩍 떠나가셨습니다.
중학교 일학년 철부지 아들이 한 ‘무식해서’라는 그 말이 왜 그토록 어머니를 아프고 화나게 했을까의 해답을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는 얼른 전표에 글씨를 써서 뒷면에 손도장을 받고 돈을 찾도록 해 주셨습니다. 아주머니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셨습니다.
글씨를 아는 사람은 모릅니다. 어디 가서 주소 성명 쓰라고 해도 못 쓰고 난 까막눈이니 대신 써 달라고 하는 게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운지를. 버스 정유소에 가서도 어디로 가는 차인지 글자를 보고도 알 수 없어 두리번거리며 아는 사람 찾아야 하는 고충을.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남들 다 읽는 신문도 책도 읽고 싶고, 속에 있는 마음도 쓰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도 보내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을 다른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무식하단 소릴 듣고 왜 그렇게 원통해 하셨는가를 나이 사십 되어 알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불효막심한가요? 까막눈 어머니에게 ㄱ자 한자라도 가르쳐 주지 못한 한이 원통하고 원통할 뿐입니다. 그 일 이후로부터 내가 어머니에게 드린 상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고 비로소 비문해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정년 한 후, 금빛봉사단원으로 7년여를 어르신들께 한글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공로를 인정받아 충청남도 우수자원봉사자증도 받았습니다. 일흔을 넘기신 분들이 무엇에 쓰려고 골치 싸매며 글자를 배우려 애쓰실까 하다가도 그동안 글자를 몰라서 받으신 한을 풀고 계신다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배움에 끝이 있을까요? 칠곡 할머니들의 기사를 읽으며 새삼 한글을 배우시고 좋아하시던 그때 그 어르신들이 그립습니다.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