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이 삭감되어 고맙다”라는 말은 안 된다
가기천의 일각일각
거의 50년이 되었다. 1975년 2월 ‘서정쇄신’ 돌풍이 불었다. 부정, 비리와 부조리를 일소하고 청탁을 배격한다는 게 목적이었다. 공직사회는 얼어붙었다. 지역에 감찰반이 왔다는 소문이 돌면 ‘서정 새가 떴다’라며 긴장했다.
그해 8월 서산군에는 감사원 특별 표본감사가 한 달간 진행되었다. 25명이나 되는 감사관이 회의실을 차지했다. 한여름 냉방이라고는 부채와 몇 대의 선풍기에 의존하던 때이니 무더운 날씨와 무거운 분위기로 뒤숭숭했다. 정부에서는 지자체에서 업체에 지고 있는 외상값을, 예산을 세워 갚으라는 특별조치를 했다. 감사 기간에 추경예산을 편성해야 했다. 당시 국가와 지방의 재정 사정이 매우 어려운 때였으니 경상비는 넉넉지 못해 외상은 일상이었다.
특근이나 야근하는 공무원들의 식대인 ‘급량비’조차 없었고 사무경비도 태부족이었다. 음식점에 외상값 장부가 빼곡하고 문구점, 인쇄소에도 갚지 못한 금액은 불어났다. 이를 깔끔하게 털어내라는 것이었다. 예산명세부기에 ‘부채 정리 특별 예산’이라고 명기하도록 했다. ‘과연 괜찮을까?’ 처음 있는 일이라 반신반의했다.
사실대로 하여 다 갚은 곳이 있었는가 하면 ‘겁나서’ 못 갚은 부서도 있다는 뒷얘기도 돌았다. 이와 함께 각 부서로부터 예산 요구를 받았는데, 기본경비 이외는 요구하는 부서가 거의 없었다. 공연히 일을 하다가 지적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소라면 예산 부서는 각 부서로부터 예산을 세워달라는 요구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때는 달랐다. ‘일하다 다치는 것보다 일을 하지 않으면 탈도 없다. 설마 봉급을 안 주기야 하겠어?’라는 인식도 보였다. 탓할 수만은 없었다. 예산 요구조차 하지 않아 문제가 될 만한 사업만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예산 요구를 했지만 계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업부서나 담당 공무원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서류상으로 요구만 하고 적극적인 반영 노력은 하지 않는 경향도 있었다.
최근 한 일간지에 눈에 띄는 기사가 보였다. “일 안 해서 좋아요…예산 깎은 야당에 감사 인사까지 했다”라는 제목이었다. “예산 깎이니 일 안 해서 좋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경제 부처의 한 간부급 공무원은 야당 의원실 보좌진과의 통화에서 이 같은 취지로 말해 구설에 올랐다. 당시는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내년도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정부의 역점 사업 예산을 대폭 삭감한 직후였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국회에선 “담당 공무원이 정부 편성 예산을 감액한 야당에 도리어 보은(報恩)성 인사를 했다더라.”라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
이 얘기를 접한 정부 관계자는 “반은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요즘 관가(官街) 분위기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일화임은 분명하다”라고 했다. 관가의 분위기는 ‘복지부동’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어떤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있었을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까? 앞의 사례는 특별한 경우라 볼 수 있다. 어쨌든 예산이 계상되지 않거나 삭감된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시책이나 사업은 재정적 조치가 뒤따라야 실현된다. 따라서 정부나 지자체가 예산이 없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피해는 오롯이 주민이나 지역이 입기 마련이다. 또한 일을 제때 착수하지 못하거나 시기가 미루어지게 된다면 그 특정 시기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길고 오래도록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충청남도공무원노동조합에서는 “‘진짜 확 달라진’ 도의회 행정사무감사”라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충남노조는 과거 과도한 자료요구와 감사 목적 이외 불필요한 자료 요구, 고성과 폭언을 동반한 고압적인 자세 등 구태와 관행을 벗어나 “도민 대의기구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라고 평가했다. 충남노조는 또 무작정 자료 요구 대신 답변에 대한 보충이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만 자료 요구하고 관련 전문가를 참고인으로 출석시켜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강압적이고 고압적이던 자세 탈피 등 3가지를 ‘가장 크게 바뀐 부분’으로 꼽았다.
도의회 관계자는 “노조가 도의회를 높게 평가하는 논평을 낸 것은 과거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다양한 모임을 통한 역량 강화와 불합리한 관행 타파를 위한 의원들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으로 풀이된다.”라고 했다. 시의회에서 귀담아들을 일이다.
요즘 입법과 내년도 예산을 두고 국회에서 여야 대립, 국회와 정부와의 갈등이 국민을 답답하게 한다. 이런 현상이 지방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특히 서산에서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서산시공무원노조에서도 “‘진짜 확 달라진’ 서산시의회”라는 논평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업이나 예산이 정쟁으로 얼룩져서는 아니 된다. 공무원들의 입에서 “예산이 삭감되어 고맙다”라는 말이 결코 나와서는 안 될 일이다. 공무원이 소신껏,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전 서산시 부시장<ka123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