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유명한 팔봉산 감자네요”
가기천의 일각일각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감자를 소재로 한 글이 두 개가 실렸었다. 하나는 장만영 시인의 ‘감자’다.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야.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아버지 주먹만이나 하구나.// 올 같은 가물에/ 어쩌면 이런 감자가 됐을까?/ 할머니는 무슨 재주일까?// 화롯불에 감자를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후략)」
선생님은 이 시를 읽은 후 “‘이 많은 감자를’보다 ‘할머니가 보내셨구나’를 앞에 쓴 것은, 감자의 양보다도 할머니가 보내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낸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화롯불에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라는 대목에서 “할머니의 사랑과 그리움을 느껴보라”고도 하셨다. 예상대로 시험에 나왔다.
또 하나는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이다.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꽃만 보고도 땅속에 있는 감자가 자주색인지, 하얀 색인지 색깔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는지 그 말을 입에 달고 뛰놀았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강원도 광산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 ‘구름은 흘러도’를 지금 1호 광장에서 홍성방면 신협 부근쯤에 있던 서산극장에서 단체 관람했다. 또래의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대부분 가난하고 배가 고팠던 시절, “감자를 얼마나 먹었어? 쌀을 얼마나 먹었어?”라는 대사가 크게 들렸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도 가슴을 무겁게 했다.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부의 딸로 바르게 성장한 복녀는 돈에 팔려가 만난 남편 때문에 지독한 가난에 시달린다. 빈민촌에서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가다 송충이 잡는 일에 나섰고, 감독의 유혹에 빠져 쉽게 돈 버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감자를 훔치다 들켜서 감자 주인인 왕서방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결국 비극을 맞는다. 곤궁한 처지의 아픈 인생을 상상하다 보면 목에 걸린 찐 감자처럼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여름 방학 때 큰댁에 가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우면서 죽 둘러앉았다. 대바구니에는 찐 감자와 옥수수가 가득했다. 사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여름밤은 깊어졌다. 감자와 고구마는 같은 듯하지만, 감자는 줄기가 뭉친 것이고 고구마는 뿌리가 뭉쳐 자란 것이라는 것도 아마 그때 들은 것 같다.
감자는 고구마와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이었는데, 지금은 건강식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유럽에서도 즐겨 먹는다. 독일하면 맥주와 함께 감자가 떠오를 만큼 감자는 독일인의 주식이다. 독일에서 감자를 귀하게 여기고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는 일화가 전해온다. 남미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감자는 먹으면 이상한 병에 걸린다고 외면 받았다. 포로에게 먹이고 가축에게나 주는 사료로 썼다. 그러나 18세기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굶주림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가 있었다. 왕은 묘안을 짜냈다. 우선 “감자는 왕실 요리에만 올릴 수 있다.”라면서 자신부터 감자를 먹는데 앞장섰다. 감자밭에 보초를 세워 지키게 하니 호기심을 품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보초를 두고 지킬 정도라면 대단히 귀한 작물로 인식하고 감자를 달리 보게 되었다. 밤에는 슬쩍 보초를 철수시켰다. 사람들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감자를 서리해서 먹고 심기 시작했다. 왕이 의도한 대로였다. 사람들은 점점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왕을 ‘감자 대왕’으로 불렀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의 묘지를 방문할 때는 감자를 올려놓는다고 한다.
‘팔봉산 감자’는 ‘농수산물품질관리법’에 따라 감자 품목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등록된 지리적 표시제 농산물이고 보니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는 우량 품종, 알맞은 토양과 재배 기술이 좋은 품질의 감자를 생산한 결과다. 시에서는 ‘고품질 씨감자’를 생산하고자 10년 동안 씨감자 안전 생산 체계를 구축하여 농가에 보급한다고 한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조직배양으로 생산한 무병묘(無病苗)를 수경 재배하여 씨감자 생산자단체에 원종을 공급하고 이를 증식하여 농가에 보급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와 생산자단체, 농민들이 합심 노력함으로써 품질 좋은 감자를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고랭지 씨감자를 구하러 강원도나 공주 유구 동해리까지 다녀야 했는데, 격세지감이다. 아무쪼록 우량 씨감자를 생산하고 재배 기술을 향상시켜 우량 감자의 명성이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연륜을 더하는 감자축제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하면 더욱 알려질 것이다.
오늘 점심은 팔봉산 기슭에서 자란 감자 몇 알과 우유 한 잔으로 대신했다. 하얀 분이 돋고 포슬포슬하니 보기에 좋고 맛도 구수했다. 시장에서 사 먹던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지인들에게 보냈더니 “아! 그 유명한 팔봉산 감자.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라는 전화가 왔다. ‘어제 뽀얀 감자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참 즐거운 계절의 맛이었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준 분도 있다. 고향 분들의 땀과 정성, 팔봉산 정경, 가로림만 갯바람까지 전해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