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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김풍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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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10.1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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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배 본지 칼럼리스트

가을 해는 짧습니다. 노루 꼬리만 하다고 합니다. 엊그제까지 더워더워 했는데 느닷없이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가을이 왔어도 가을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 곧장 겨울이 닥칠 기세입니다. 봄가을이 없어진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  

 

유리알 같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니 갑자기 여행하고 싶었습니다. 아침 산책하러 나왔다가 가을 하늘을 보고 무작정 길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정년퇴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카드 한 장 달랑 들고 한 두어 시간 걸리는 옥천이나 금산 쪽을 다녀올까 나섰다가 경주에서 하룻밤 자고, 거제도에서 하루, 그리고 광주 무등산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매일 짜인 일정에 밀려 삽니다.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마침 해미읍성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비록 멀리는 못가더라도 거기라도 가고 싶었습니다. 여행 기분을 내고 싶어 승용차를 포기하고 공용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마침 무인 발권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끔 서울이나 대전 같은 곳에 갈 때만 버스를 이용했기에 가까운 거리는 늘 승용차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무인 발권기 앞에 서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기계 앞에 선 필자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서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문맹(문명 맹인)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계 앞에서 망설이다가 곁에 선 젊은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기 전에는 거의 20여 개 전화번호를 암기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내 번호밖에 알지 못합니다. 스마트폰 속에 입력되어있어 굳이 번호를 외우지 않아도 통화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기계 만능 시대입니다. AI라는 기계가 사람을 대신합니다. 손 안에 든 기계 하나만 가지고도 공식만 알면 얼마든지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꺼낼 수 있습니다. 뭐 하러 힘들고 귀찮게 지식을 머리에 저장할까요?

 

기계는 공식입니다. 아마도 전화번호처럼 외우지 않아도 공식만 알면 애써 공부해서 지식을 머리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온 듯합니다. 책을 읽는 대신 검색 기술만 익힌다면 얼마든지, 어떤 자료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누군가 ‘책은 죽었다’라고 합니다. 종이책의 종말을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를 뇌에 저장하는 것과 기계로 찾아내는 것을 결코 동일선상에 놓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두뇌는 보이지 않는 곳을 볼 수 있고 들리지 않는 걸 들을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기계가 따를 수 있겠습니까? 기계에서 튀어나온 1,700원짜리 승차권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승차권을 들고 승차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위에 걸린 행선지 표시판에 ‘해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후 다섯 시까지는 십여 분 남았습니다. 눈치로 홍성이라 쓰여 있는 대기석 근처에서 기다렸습니다. 나무 의자에는 동남아에서 온 듯한 젊은 여성들 대여섯이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앳된, 잘하면 스무 살 좀 넘은 아가씨 둘이 같은 나라말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없이 순진한 얼굴들이었습니다. 세상 때 하나 묻지 않은 정말로 풋풋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문득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풋사과 같은 싱싱함에 마음이 끌려 말을 걸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물었습니다. 두 사람 다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가느냐 물으니 서툰 한국말로 고북면에 간다고 했습니다. 의외로 한국말을 잘하기에 얼마나 되었느냐 물으니 두 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 하느냐고 물으니 여행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인솔자 같은 한국 사람이 있기에 근로자들로 보였는데 여행이라 해서 내심 놀랐습니다.

 

그래, 돈을 벌러 왔든. 친구 따라왔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인생길 자체가 여행길이 아니던가? 왜 하필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했을까 자책하며 넘겨다보니 그들의 스마트폰에 한국의 경치가 보였습니다. 나는 우문에 보답이라도 하듯 내가 찍은 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그들을 따라 버스에 오른 후 그들보다 두어 칸 뒤에 앉아 밖을 내다봤습니다. 승용차로는 볼 수 없는 황금 들녘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리실 수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여행은 꼭 먼 거리를 가야 하나요? 생전 처음 승차권도 뽑아보고 외국인과 대화도 해보고 멋진 풍경도 보았으니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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