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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10.0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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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배.jpg

 

무주의 맹시(無注意 盲視)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를 증명한 이들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와 일리노이대학의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입니다.

이들은 이른바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동영상으로 이를 증명하였습니다.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이리저리 움직이며 농구공을 패스하게 하고 이 장면을 촬영하여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한 팀 학생들은 흰색 셔츠, 한 팀 학생들은 검은색 셔츠를 입게 했습니다. 동영상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는 흰색 셔츠 팀의 패스 횟수를 세라고 지시했습니다.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무려 9초 동안 가슴을 두드리며 지나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청하던 수천 명의 학생 절반 정도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릴라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우기기까지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의 실험을 통해서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라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필자도 얼마 전에 이런 무주의 맹시를 경험하였습니다. 매주 목요일에는 모 주간 보호 센터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집사님 한 분에게 부탁하여 특별 찬양 순서를 넣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임박하여 문득 그 집사님이 코로나 후유증으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를 드렸으나 응답하지 않아 그대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액정을 보니 그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배 중이기 때문에 거절 신호를 보내고 그대로 예배를 진행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 집사님의 상태가 궁금하여 전화를 걸었습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 집사님의 음성이 싸늘했습니다. 나온 대답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더니 그 집사님은 예배 장소에 왔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들려오느라 조금 늦었지만, 분명히 예배 장소에 왔었다고 합니다. 그때 필자는 설교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본인이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어른들 옆 공간에서 여러 번 오가기를 반복했다고 하였고 심지어 자기 쪽을 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못 보았다고 했으나 어떻게 못 볼 수가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구차한 변명 같아서 정말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미안하게 되었다며 사죄했습니다. 보지 못한 잘못은 전적으로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집사님은 “못 보셨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요”라는 말에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설교 중에는 듣고 있는 어르신들에게만 집중합니다.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관심이 없습니다. 요양보호사들이 왔다 갔다 해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당연히 그 집사님도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지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어찌 시각뿐이겠습니까?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맹신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본 것, 자기가 들은 것이 확실하다고 단정합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는 윤 대통령의 방미 중 발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사실을 놓고 여(與)와 야(野)가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이는 바로 자기들이 듣고 싶은 대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전제되지 않는 기사는 기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논란거리 기사는 사회적 혼란만 불러올 뿐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주의 맹시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이 틀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를 경계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편견과 아집과 맹신일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눈,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가 있는 한 사회적 갈등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쇠락의 길을 가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고 한다면 훨씬 더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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