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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신의 그대를 위한 詩 -6-

- 최정례, 「붉은 밭」 전문(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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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4.1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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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이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 최정례, 붉은 밭전문(창비, 2001)

 

감상

도신 스님.jpg

오래어 낡은 것에서, 시든 것에서, 허름해진 것에서, 주름 깊은 것에서 시간을 거슬러 갈 수만 있다면, 빛나는 장롱과 금방 피어오른 꽃과 깨끗하게 잘 접어진 손수건과 얼굴 고운 소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단면으로 전체를 판단한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존재는 한때 가장 아름다운 과거가 있었다. 오래된 모든 유물이 감동을 주는 것은 과거의 아름다움과 사연을 지녔기 때문이다.

지금 이가 빠져 잇몸이 드러나고 얼굴에 생기가 빠져 주름이 깊게 파인 늙은 여자가 당신 앞에 있다면 그녀에게서 소녀를 보고 그녀에게서 수정 같은 눈을 보도록 하라. 당신의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것처럼, 낡고 허름한 것에서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열어 보라.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당신이 바라보는 보는 모든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실제 당신의 행복이 여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도신/서광사 주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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