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22.03.23 10:08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빈의자

 

정호승

 

빈 의자는 오늘도 빈 의자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가장 외롭지 않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가끔 심장을 꺼내 햇볕에 말리고

 

의자에 앉았다 간 사람들이 놓고 간 더러운 지갑도

휴대폰도 꺼내 말린다

빈 의자는 오늘도 빈 의자에 앉았다 간 낙엽을 생각한다

 

빈 의자는 오늘도 빈 의자에 앉았다 간 첫눈을 생각한다

첫눈 위에 발자국을 몇 개 찍어놓고 간 산새를 생각한다

그 산새를 따라가며

빈 의자에 앉았다가 울고 간 사람을 생각한다

 

빈 의자는 비어 있기 때문에 의자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가장 고독한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가장 정의롭다

먼 데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잠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당신을 가장 기다린다

 

시평

 

도신 스님.jpg

세상에 있는 의자들은 무언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려고 한다. 그것이 의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삶의 방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공원에 있는 빈 의자가 왜 반가운 것일까. 욕심내지 않는 사람이 왜 아름다워 보일까. 공원에 있는 빈 의자는 나도 앉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욕심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편안해 보인다는 건데 그들을 보면 정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도 뺏으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빈 의자의 또 다른 의미는 자기 자리를 말한다. 다른 의자와 달리 빈 의자로서의 자리를 지키는 의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많은 사람이 피난을 택했다. 이것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라를 떠났던 우크라이나의 많은 남자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다시 들어가고 있다. 생사에서 삶을 우선하는 우리의 입장에선 이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목숨을 지킬지라도 나라를 잃으면 앉을 곳이 없어진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것은 삶의 무의미와 맞닿아 있다. 시인은 빈 의자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당신과 내가 우리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다 흔들려도 당신과 나는 우리 자리를 지켜야 한다./도신 서광사 주지스님

 

태그

전체댓글 0

  • 28409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도신의 그대를 위한 詩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