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물이 나왔구려!”…천하 통일한 청나라 태종 예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6)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6)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정충신은 즉시 왕명을 받들어 일행 몇 사람을 데리고 심양에 도달했다. 청태조 누루하치 또한 영웅이었던지라 정충신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사신으로 왔다는 소식에 기운을 꺾어볼 심사로 기지 창검 금부은월도로 좌우를 호화찬란하게 장식하고 용장강병(勇將强兵)을 벌떼와 같이 배치시켜 삼엄하고도 위압적인 기세로 정충신을 시험했다. 그러나 정충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자약하니 누루하치가 들어서며 거만하게 말을 건다.
“조선에서는 그처럼 사람이 없어서 너같이 부녀자 모양인 소장부를 타국에 보내어 국사를 탐판하게 한단 말인가?”
충신은 이 말을 듣고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신 등급이 있어서 타국에 사신을 보낼 적에 예외를 숭상하고 도덕을 준행하는 나라에는 대인군자(大人君子)를 보내지만 위력만 믿고 포악만 사용하는 나라에는 소장부(小丈夫)를 보내는 고로 내가 그대의 나라에 사신으로 왔더니 그대는 내가 소장부인 줄은 알아보는군.”
누루하치는 정충신을 무안하게 하려다 도리어 무안을 당하고 대답할 말이 없는지 딴소리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런데 그대의 나라에서는 어찌 명나라와만 교섭하고 나의 나라를 멀리 하느냐?”
정충신은 샛별 같은 눈을 부릅뜨고 누루하치를 바라보며 “그대는 예의도 은혜도 신의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명나라와 우리나라는 도움을 받고 은의(恩義)가 있는 나라인데 그 신의와 은혜를 잊지 않고 행동함이 당연한 도리거늘, 묻는 그대가 오랑캐가 아니고 무엇이가?”
이 책망을 들은 누루하치는 범상한 사람 같으면 대단히 분노하겠지만 그도 또한 호걸이라 허허 웃으면서 “그것은 내가 실수한 말이다. 그대의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서에 나더러 종놈이니 도적놈이니 하거늘 그 연유가 무엇인가 분명히 말하라.”
충신은 답했다. “그대가 천하를 도적하려 하니 그대 같은 큰 도적이 또 어디 있겠는가?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도적놈을 잡아서 죽이지 아니하고 종으로 부리는 고로 그대에게 도적이라고도 하고 종놈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조선에서는 그대의 나라를 공격한 일이 없는데 의심을 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여 생트집을 잡으니 어디에 그런 경우가 있는가?”
누루하치는 정충신의 일장설화를 듣고 노여워할 줄 알았더니 노여워하기는커녕 기뻐하는 기색으로 자리를 옮겨 다가앉으며 충신의 등을 두드리고 친절이 대해 주었다. 누루하치는 정충신과 막역지교(莫逆之交)를 맺고 자기 아들들을 불러 충신에게 인사하게 하니 충신은 그들의 절을 앉아서 받더니 마지막 순서의 왕자가 절을 할 때에는 몸을 급히 일으켜 빗겨 서며 맞절을 했다. 누루하치는 슬며시 그 연고를 물으니 충신은 숙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대인물이 세상에 나왔구려!” 그 아들은 후일 천하를 통일한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였다. 정충신의 사람 보는 법이 이러했다.
충신이 청나라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다녀온 후로 누루하치는 다시 조선을 범하지 않았으니 정충신의 공이 자못 크고 장하다 하겠다.
어느 날 백주는 홀연히 행장을 수습하여 어디로 가려는 기미가 보임에 충신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백주는 분명한 대답이 없어서 구차스럽게 다시 묻기를 그만두었다.
당시 임금인 광해군은 주색을 가까이하며 음란을 즐기니 조정에는 간사한 무리가 가득하여 어진 신하를 모함하고 골육지친을 이간하여 아우인 영창대군과 의조부인 김제남을 모반죄로 죽였다.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여 서궁에 감금하는 일까지 자행하였으니 천하 만고에 자식이 어머니를 폐하여 가두는 일까지 있었는가!
그때 오성대감 이항복은 원임 대신으로 집에 있다가 모후를 폐하는 변이 있음을 보고 분연히 붓을 들어 상소를 지어 아뢰기를 “윤리에 어그러지는 일은 범상한 백성이라도 못 하는데 하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써 어찌 가히 행하리오” 하고 어명을 급히 거두라는 뜻으로 간절하게 상소했다.
그러나 어두운 임금과 간사한 무리가 득실대는 조정에 충직한 재상의 바르고 옳은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시행되기는 고사하고 임금에 거역하였다는 죄로 몰아 함경도 북청에 유배하기로 하고 벽파만호 정충신은 이항복의 사람이라 하여 벼슬이 떼어졌다. 세상 형편이 그쯤 되어 벽파만호까지 갈린 소식이 벽파진에 이르렀음에 정충신 개연히 탄식하고 배소에 가는 오성대감을 뵈려고 길을 떠나려 할 때 백주가 진작 행장을 수습하여 놓았으니 지체될 것이 없었다. 백주를 데리고 주야로 서둘러서 오륙일만에 한양에 도달하였는데 오성대감이 발행(發行)할 날이 수일쯤 있었다.
정충신은 계모를 서궁에 가두게 한 임금의 곁에 있는 간신 허균 등을 제거하려고 어두운 밤에 비수를 품고 뛰어들었으나 도적이 집에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행장을 수습하여 오성 대감을 모시고 갈 때 오성 대감의 나이 이미 육십이 넘었으며 오성은 철령 높은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생각에 임금이 있는 아득한 대궐을 바라보며 울적한 마음을 노래로 불렀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님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리”
이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처량하게 하여 같이 가던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정충신은 북청 배소에서 오성대감을 모심에 자식같이 매사를 거행할 적에 충신도 당연한 일로 알았거니와 오성대감도 불안한 마음이 없었다. 충신은 글을 잘 하고 글씨를 잘 쓰기에 오성대감의 왕복되는 서류를 모두 대서하고 매일 일기로 기록하였으니 그것이 ‘백사선생북청일록(白沙先生北遷日錄)’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