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7(토)

정충신 흠모하던 여염집 처녀의 죽음…“남편으로 알고 떠나시게”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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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10.30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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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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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군복(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이 갑옷은 두정갑으로 속에 가죽이나 쇠로 만든 비늘이 없다. 우리나라 현존 갑옷 중 본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갑옷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정경부인은 어떤 까닭인지 모르지만 쫓기는 사람은 사위요, 쫒는 사람은 정충신이라. 까닭은 나중에 알더라도 우선 급한 불부터 끌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충신아! 이것이 무슨 짓이냐? 썩 나가거라!” 하는 즈음에 오성대감이 퇴궐해서 집에 오니 사랑에는 아무도 없는데 내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조복도 벗지 않고 곧 내당으로 들어와 보았다. 숨은 사위와 꾸짖는 아내, 칼 들고 성난 정충신의 거동을 본 오성대감은 정 충신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다.

 

까닭을 들은 오성대감은 “대장부가 말을 뱉었으면 시행 해야지.”하며 정경부인 뒤에 숨어있는 사위의 손목을 끌어내어 충신 앞에 밀어붙이니 부인은 겁을 내어 “대감! 왜 이러시오?” 했다. 집안사람들도 놀라서 “에고 머니!”했지만 오성대감은 들은 체도 않고 충신에게 “자, 내기를 시행 하여라” 했다.

 

충신은 자신의 성격으로는 바로 목을 베고 싶었지만 주인대감과 정경부인 안면을 보고 목을 벨 수가 없어 대신 칼을 들어 상투를 싹둑 베어 들고 사랑으로 나왔다.

정경부인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대단히 노여 했지만 대감이 주장하신 터라 어찌 할 수 없었다. 윤한림 또한 그 지경을 당하여 매우 분했지만 자기가 실수했기에 어찌 할 수 없었다. 모두 대감께서 혹시 분풀이를 하여 주실까 바랬으나 그것은 헛된 생각이었다.

오성대감은 곧 사랑에 나와서 조복을 벗고 앉아서 충신을 불러 세우고 “너는 어찌 윤옥의 목을 베지 못하였느냐? 나는 네가 도원수를 할 줄 알았더니 오늘 보건데 부원수 밖에 못하겠구나!”하자 충신은 공손히 듣고 송구할 뿐이었다.

 

오성대감댁은 필운동이라 그 골목 안에 있는 여염집 처녀 하나가 십칠 세의 나이로 출가하지 못하였는데 정 충신의 용모가 남중일색임을 보고 흠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나 뜻을 이룰 길이 없음에 우울증이 극에 달하여 질병이 되었고 점점 침면(沈眠)하여 결국 세상을 버렸다. 그 처자가 세상을 버리던 날 밤에 충신은 오성대감댁 사랑 윗방에서 혼자 자다가 자리가 편하지 아니하여 깨어 본즉 자기의 옆에 누가 누운 것을 느끼고 불을 켜고 자세히 보니 병들어 죽은 여자의 시신인데 눈을 감지 않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놀랠 듯도 하지만 정충신이 놀라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수년 이래 골목 안에 드나들 때에 앞집 처녀가 번번이 웃어 보이다가 혹간 얼굴을 드러내고 혹간 소리를 내어 친하고자 함을 알았으나 체면이 있는 바에 아는 체 하지 않고 다닌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같이 괴상한 일을 당하였으나 아마 그 처녀가 죽어서 원혼이 헤어 지지 않았으므로 시신이 움직여 왔는가 보구나 하고 앞집에 나가 탐문하니 과연 처녀가 죽었는데 시신이 홀연히 없어졌다 한다. 충신은 그 처녀 부모를 데리고 와서 시신을 어루만지면서 “정이 있거든 말을 하거나 말하기가 어려우면 서찰이라도 하지, 내가 그대를 저버림이 아니라 그대가 스스로 슬퍼했구나. 이제는 할 수 없으니 나를 그대의 남편으로 알고 돌아가시게” 이 말이 끝나자 처녀 시신의 두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스스로 감았다.

 

선조임금은 세상을 뜨고 아들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항복 오성대감은 정충신이 크게 쓸 만한 장수 제목이라고 광해군에게 아뢰었음에 광해군은 병부에 분부하여 평안도 백파만호를 제수하여 도임 한 후에 감영에 치진하였는데 기이한 인연을 만나다. 그 때에 평안도 감영에 백주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얼굴이 절색이오, 노래가 명창이며 또 지조가 높아서 이름은 비록 기생 안책에 매었으나 영웅이 아니면 섬기지 않겠노라 맹세하고 몸을 남에게 허락한 일이 없었다. 정 총신이 치진한 때는 마침 감사의 생신이라. 10읍 수령을 모아 놓고 생일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때에 좌중에 있는 백주를 가리키며 여러 수령을 향하여 “오늘 좌석에 계신 여러 수령 중에서 누구든지 글을 지어 저기 있는 기생의 가사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중매하여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하오리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러 수령들은 감사의 말을 듣고 생각건대 백주의 지조 높음을 아는 바에 자기의 인품으로 그의 뜻에 맞지 못할 줄을 알지만 감사의 말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어 각기 글을 써 놓았으나 백주는 곁눈으로 본체만체 한다. 벽파단호 정충신은 빙긋이 웃기만 하고 앉았다가 감사가 여러 번 재촉하자 마지못해 글 한수를 지었다.

“저 중류에 떠있는 작은 잣나무 배는 몇 해나 빈 채로 푸른 물결 머리에 매였더냐. 곁에 사람이 만일 누가 먼저 건너가겠느냐 묻거든 문무 겸한 만호후라 할 것이다.”

 

백주는 그 글을 보더니 앵두 같은 입을 열어 옥구슬 같은 소리로 옵조린다. 좌중에서 모두 갈채함에 감사도 크게 기뻐하여 “백파만호는 저 기생의 남편 되기를 사양할 수 없게 되었소.” 하며 친히 술잔을 부어 한잔은 만호에게 전하고 한잔은 백주에게 전하였음에 두 사람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으니 이는 초례청 합환주인 셈이었다.

 

그날 밤, 감사는 비장을 시켜 따로 숙소를 잡고 두 사람을 인도하며 인연을 맺게 하였으니 이는 기이한 인연이 아닌가? 그 이튿날 벽파만호는 백주를 데리고 자기 고을에 내려가 꽃과 나비 같이 물과 고기같이 즐겁게 지내는데 얼굴만 예쁘고 노래만 잘 할뿐만 아니라 절통한 재주를 또 가졌으니 그것은 점을 치면 앞일을 능히 알아내는 것이다.

 

하루는 백주가 만호에게 “급한 일이 있으니 내일 안으로 감영에 치진하시오” 했다. 이에 만호는 의아하여 “무슨 일이 있는가?”하고 물으니 “무슨 일인지는 가서 보시면 아실 것이요”라고 하기에 재차 묻기가 곤란하여 하인을 거느리고 감영에 치진하여 감사를 만났다. 감사는 죽을 기색을 하고 있었다. 정 충신이 사유를 물으니 감사는 “지금 명나라 사신이 이곳에 이르며 은자 삼만 량을 납백 하라 하고 만일에 이것을 거행하지 못하면 내가 대단한 곤욕을 보게 되었으니 이 어찌 걱정이 아니오?” 하고 답답해한다. 뜻밖에 벽파만호가 치진함에 감사는 그가 지락 있음을 기왕부터 알기에 반색하여 손을 잡으며 좌우를 물리치고 명나라 사신의 행악한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간청한다.

 

당시 명나라는 우리나라를 구원한 후부터 사신이 나오면 토색질이 무쌍하여 턱없이 재물을 수습하여 가는 일을 종종 하였는데 이때에도 사신이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평양에 이르렀다. 만호는 속으로 “급한 일이 있다 하더니 바로 이 일이로구나”생각하고 감사한테 “그는 어렵지 아니하니 사또의 권리를 하관에게 반나절만 빌려 주시면 무사히 만들어 놓겠소이다”했다. 감사는 무사하겠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면서 “권리는 고사하고 나의 몸까지라도 빌려다가 일만 무폐하게 만들어 주오”하면서 상을 내어 권한다. 만호는 임의대로 하라는 감사의 권리를 받아 가지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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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투구(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 1975년에 도난당함)…괴목으로 만든 원두형의 투구(높이 50cm, 직경 45cm)로 현존하는 유물로는 재질이 목재인 것이 유일하고 모양도 독특하다.

 

이튿날 아침, 만호는 객사에 좌기한 후에 영리한 사람 몇 명을 불러 귀에 대고 무엇이라 몇 마디 분부하였음에 이들이 나간 지 얼마 만에 홀연히 온 성중(城中)이 불끈 뒤집혀 물 끓듯 하고 백성들이 울며불며 부모와 자녀를 이끌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모두 황망히 성문 밖으로 나간다. 이때 명나라 사신은 영빈관에 앉아서 감사가 은자를 가져 오기만 기다리는데 별안간 성중(城中)이 요란하며 난리가 났음에 의아하여 또 알아보아도 난리 났다는 같은 말이라 겁이 나서 급히 돌아와 다른 사신에게 그 사유를 말하는데 방포 터지는 소리가 크게 난다. 사신은 크게 놀라 황겁한 걸음으로 군복을 입고 긴 환도를 짚고 앉아있는 정충신에게 곡절을 물음에 충신은 엄연히 앉아서 잔뜩 험악한 표정으로 “권리가 없어서 죽을 바에는 죽을 권리까지 막지 마시오.”했다. 그 말이 그치자 방포 소리가 또 한 번 크게 터졌다. 크게 두려움을 느낀 사신 일행은 부리나케 행장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재빨리 말에 올라타 길을 재촉하여 바람같이 몰아 달아나는데 잠시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오백리나 되는 의주에 도달하였으니 며칠 두고 연호 각읍에서 당했을 폐단까지 막았던 것이다.

 

정 충신은 사신을 쫓은 후 백성들을 도로 불러들여 안심시키고 선화당에 들어가 감사를 뵈니 감사는 무수히 치사하면서도 후탈이 있을까 염려함에 충신은 그렇지 아니한 곡절을 말한다. “자기가 먼저 불의를 행사 하려다 탄도가 났으니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라고 감사를 안심시키고 일을 다 마친 후에 하직하고 환관 했다.

 

이와 같이 조선은 임진왜란 후 까지도 혼란 상태에 빠져있을 때 만주에서는 건주호인(建州胡人) 누루하치가 일어나 흥경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제 부족을 통일하고 건국하여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했다. 후금의 누루하치는 차츰 세력을 모아서 우리나라와 명나라의 침범을 엿보더니 마침내 명나라의 변경을 침략하므로 명은 양호를 총수로 삼고 이여송 등의 제장으로 하여금 대군을 발하여 이를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도 원병을 청하고 재촉이 심하였다. 광해군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으나 앞서 임진왜란 때의 의리도 있음으로 마침내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로 하여금 1만 3천의 병을 거느리고 원정하여 명군을 돕게 하였다.

 

강홍립 등은 압록강을 건너 명군과 합세하여 적지에 들어가 부차(흥경 동쪽 60리)에서 후금의 대부대와 싸웠다. 이 싸움에서 명군이 대패하고 조선군도 포위되어 선천군수 김응하 이하 및 몇몇 장수가 전사하였다. 강홍립은 적진에 통하여 조선의 출정은 부득이 한데서 나왔다는 것을 표명하고 그 무리와 함께 후금에 투항했다. 이는 강홍립이 출정 전에 왕으로부터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받았던 까닭이다. 강홍립은 적진에 있으면서 내정을 본국에 알리는 한편 양국간의 화의를 성립시키고 알선하며 활약했다. 이같이 후금의 세력이 강성하여 짐에 조선에서도 북방 경비에 모든 힘과 지혜를 다했다.

이때 정충신은 보하진(甫下鎮)을 지켰다. 정충신은 이곳에 머물면서 고려 명장 윤관 장군의 유적을 살피고 시 한수를 지었으니 제 보하진(題 甫下鎮)이라는 시(詩)다.

 

“천년이 지난 자취도 새가 나르는 사이인데/ 문공의 비석에는 이끼만 얼룩졌구나./ 우습다, 옥문관의 반(班)을 정(定)함이 멀었는지/ 몇 해를 고생하며 살다 가기를 빌었던가”

 

과연 충신은 문무가 겸한 명장이 될 바탕이 이미 갖춰진 사람이었다. 이전부터 명나라가 차차 피폐하고 청나라 가 점점 강성하여 후금의 누루하치는 웅장한 기세와 심원한 지략으로 천하를 통일 하려는데 자기 군사를 몰아 중원에 들어간 후 조선에서 그 뒤를 음습할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두어 차례나 우리나라 변방에 들어와 압력으로 화친하자 하며 말하기를 “너의 나라에선 나더러 항상 도적이니 종놈이니 하는 말로 왕래하는 문서에 기재하니 내가 언제 누구 집에 가서 무엇을 도적질하여 왔으며 내가 언제 누구 집에 가서 종노릇 하였더냐? 그 무슨 버릇없는 말인지 사리와 경우를 알고자 하니 분명히 답변하면 모를까 그렇지 아니 하면 군사를 몰아 곧 너의 나라 도성에 들어가 옥석을 가리지 않고 소탕하리라.”하고 협박을 해 왔다.

 

조선에서는 그 겁박에 답하기도 하고 겸해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야겠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어 조정 상하가 어찌 할 줄 모르더니 한 신하가 임금한테 아뢰기를 “누루하치는 영특하고 강맹한 인물 이온 바 조선을 향하여 짐짓 트집을 잡으려 하오니 사신을 보내 변명하여야 무사하겠사온데 여간한 사람을 보내어서는 왕명을 세우기가 쉽지 못하오니 만포진첨사 정충신이 문무 겸재하오니 특별히 사명을 맡겨 보내면 일은 완전할 것입니다.”했다. 그 말은 들은 임금은 정충신을 후금에 보내도록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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