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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Ⅱ

김풍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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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10.2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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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배.jpg
김풍배/본지 칼럼리스트

황금 들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건물들이 보였습니다. 해미 시내였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앞에 앉은 그녀들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잘 가요’라고 인사하니 환한 미소로 답례해 주었습니다.

 

시내엔 온갖 차량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차를 놓고 오기를 참 잘했습니다. 읍성에 들어가는데 임종국 수문장이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그는 나의 확실한 구독자입니다. 언젠가 읍성에 들어가다가 내 시가 좋다고 하기에 시집을 보내준 적도 있습니다. 건강미가 넘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듬직합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의외로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대공연장에서는 리허설이 한창이었습니다. 동헌 쪽 뒷산에는 붉은 물감을 엎지른 듯 붉게 타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꽃무릇 군락이었습니다. 감탄하고 있는데 누군가 청허정 뒤로 가보면 더 많다고 하기에 뒤로 돌아 솔숲으로 갔습니다. 해가 기울었는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습니다.

 

언덕에 올라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붉은 구름이 용처럼 길게 누웠습니다. 마침, 해가 구름에 걸려있어 마치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습니다.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으려 화면을 보니 앞에 전봇대가 가려있어 좋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장소를 옮겨 찍으려니 이미 해는 구름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기회는 타이밍입니다. 인생에서 성공의 비결은 기회를 잘 잡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꽃무릇 군락지로 갔습니다. 무리 지어 핀 꽃을 가까이 보니 생각보다 감흥이 덜했습니다. 가까이 보니 부러진 것도 있고 바랜 꽃도 보였습니다. 너무 가까이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림 감상도 좀 떨어져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찌 그림이나 꽃무릇뿐이겠습니까? 사람도 한문으로 쓸 때 인간(人間)이라 합니다. 사람인(人)에 사이 간(間)을 붙여놓은 건 사람과 사람도 사이가 있어야 한다는 걸 뜻 일 겁니다.

 

삼강(三綱)오륜(五倫)도 임금과 신하 사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 부부 사이, 노인과 젊은이 사이, 친구와 친구 사이에 있어야 할 도리와 질서를 채워 놓은 것입니다. 그걸 잘 설명한 선조들의 지혜라 생각하면서 청허정에 올랐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짙어졌습니다. 동트는 시간보다 지는 시간이 훨씬 빠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인생길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될 때까지의 세월보다, 늙어서 아이가 되는 세월이 훨씬 더 빠른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니, 전깃불이 들어왔습니다. 세상이 환해졌습니다.

 

청허정에서 내려오다 대숲 길로 들어섰습니다. 대숲 가운데 길을 만들어 대나무가 하는 소리를 듣게 해 놓았습니다. 문득 대숲을 AI는 무어라 할지 궁금했습니다. 손에 들려있는 기계에 물었습니다. 대숲은 대나무가 많이 우거진 숲. 대나무는 벼목. 볏과 대나무아과에 속하는 다년생 상록초본. 그런데 나태주 시인은 대숲을 보고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라고 했습니다.

 

걸어가면서도 들여다보는 손안의 기계는, 절대로 대숲에서는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고 생각도 없고 마음도 없습니다.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도 없습니다. 승차권 자동판매기 앞에서 머뭇댔던 기계와의 불화를 다시 생각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했을 시간, 벌써 이슥한 밤이 된 듯 어둠이 밀려왔습니다. 서둘러 버스 정류소로 갔습니다. 건물 입구에 자동 매표기가 보였으나 두말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스표를 끊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 시대 사람이었습니다. 버스는 정확하게 일곱 시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 오르자, 기사님은 표를 보자고 하더니 300원을 더 내라고 했습니다. 올 적 버스값은 분명 1,700원이었는데 왜 300원을 더 내라고 할까? 의아해서 둘러보니 직행버스가 아니고 좌석 시내버스였습니다. 버스 요금 체계가 다른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상식이었습니다.

 

정확히 두 시간 동안의 여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참 많은 걸 보았고 체험했고 느꼈습니다. 여행의 묘미를 어찌 시공간을 따져 말하겠습니까? 참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짧고도 긴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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