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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꽃

김풍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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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08.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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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배 본지 칼럼리스트

 사나운 더위와 맞서 정열을 불태우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배롱나무꽃입니다. 이글이글 타는 빨간 배롱나무꽃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태양을 빨아들여 제 몸속에 태우는 착각에 빠집니다. 모든 꽃이 더위를 피해 봄에 활짝 자태를 뽐내어도 이런 한여름에 피어 태양과 벗하는 꽃은 몇 안 될 듯싶습니다.

 

배롱나무꽃은 색깔도 다양하고 또한 그 이름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빨간색 일색이었으나 지금은 연분홍에서부터 노란색, 하얀색 등이 있습니다. 그 이름도 다양합니다. 백일 동안이나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목백일홍입니다. 그런가 하면 줄기를 만지면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듯 흔들거려 간지럼 나무, 간질밥 나무로 불리기도 합니다.   

 

필자의 생가 마당가에 한그루의 배롱나무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빨갛게 핀 배롱나무꽃 그늘에서 앉아서 소꿉장난하며 놀다 시들해지면 손톱으로 나무 밑동을 긁었습니다. 그러면 나무가 마치 간지럼을 타는 듯 잔가지들이 흔드는 걸 보고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후에 그 나무가 백일홍 나무, 그리고 배롱나무란 걸 알았습니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여름꽃 배롱나무를 바라보노라면 아득한 전설 속으로 빠져듭니다. 백일홍 나무의 전설을 들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제는 고인이 되신 한종익 선생님에게서입니다. 백일홍 나무를 볼 때마다 선생님과 함께 그때 들었던 전설이 생각납니다.  

 

옛날 남쪽 어느 바닷가 마을에 해룡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매년 처녀를 바쳐 해룡을 달래었습니다. 마침 한 처녀가 제물이 될 차례가 되었는데 그를 사랑하던 소년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처녀를 구하려고 해룡과 싸우려 바다로 나가며 돌아올 때 이기면 흰 깃발을, 지면 빨간 깃발을 달고 오겠다며 약속했습니다.

 

처녀는 언덕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약속한 100일이 되었을 때 멀리서 소년 용사가 탔던 배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기쁨으로 배를 쳐다보는데 안타깝게도 배에는 빨간 깃발이 보였습니다. 낙심한 처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해룡을 물리치고 돌아온 소년 용사는 깃발에 해룡의 붉은 피가 묻어있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걸 알게 된 소년 용사는 애통하며 사랑하는 처녀를 언덕에 묻었습니다. 후에 그의 무덤에서 나무가 자라서 빨간 꽃을 100일 동안이나 피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 나무를 백일홍 나무라 불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전설을 안고 살아서 인지 몰라도 배롱나무를 소재로 시도 쓰고 소설도 썼습니다. ‘배롱나무꽃’이란 제 졸시입니다.

 

‘사랑이란/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맨몸 같은 것/아무런 가식도 없는 것/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것//사랑이란/살짝만 건드려도/발끝부터 정수리까지/온몸 간지러운 것/까르르 웃음 나오는 것//사랑이란 /샘물처럼/펑펑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졸졸 흐르는 것도 아니지//사랑이란 /한 번 피어 백일 가는 게 아니고/피고 지고, 지었다 다시 피는/ 배롱나무꽃 같은 게 사랑이야//백일홍이라 부르지 말아다오/미끄러운 사랑 붙들고/일생을 견디어 간다.’  

 

‘화무십일홍이라고 무슨 뜻인지 알어? 피어서 열흘 가는 꽃이 웂다는 게여. 그런디 배롱나무꽃은 백일이나 간다는 게여. 그렇다구 실지루 백일 가는 줄 알어? 아녀. 그게 아닌 게여. 한 송이가 피어서 시들면 다른 송이가 피어서 진자리를 메꾸는 게여. 그렇게 백일이나 피어 있으니께 사람들은 그런 줄두 몰르구 백일홍이라 그러지. 남녀 간 사랑두 그런 게여. 사람이 워떻게 계속 사랑만 할 수 있겄어. 워떻게 맨날 이뿌기만 허겄어. 그레두 참구 노력허다 보면 미워졌다가두 이뻐지구, 살다 보면 정두 생기구 그런 게지. 그렇게 해서 백년해로하는 게여. 그럴 자신 없으면 애초부터 꽃을 피우지 말어.’ 

 

필자의 ‘배롱나무’라는 소설 한 대목입니다. 폭염 앞에 당당히 맞서는 배롱나무꽃을 바라보며 움츠러드는 삶의 고단함을 추스릅니다./본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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