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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김풍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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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06.2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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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배 본지 칼럼리스트

얼마 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모르는 전화이기에 받지 않으려다 하도 오랫동안 울리기에 받았더니 다짜고짜 이름을 확인하더니 주소가 맞느냐고 했습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종친회 족보 편찬 회’라면서 족보를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신청한 적도 없고 내용도 몰랐지만, 무조건 보내준다는 말에 어정쩡하게 알았다고 했습니다. 얼결에 대답하고서 자세한 내막도 알지 못하고 승낙한 듯해서 바로 전화했으나 신호만 가고 응답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책이 배달되었습니다. 포장을 뜯어보니 ‘안내 말씀’이라는 서간이 들어 있었습니다. 종사보감을 발행하여 보급하는 일을 소명으로 안다며 작금의 시대에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후손들에게 계승하여 일가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취지 설명과 함께 책 대금 20만 원씩을 송금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충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시조 김수로왕의 사적과 본관지의 연혁, 각종 유적지에 관련된 사진, 파명록(派命祿), 주요 세거지(世居地), 세계표(世系表) 등이 있고 씨족사의 개요와 주요 인물들이 전기가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일일이 읽어 보고 싶었지만, 목회 일과 달빛 시낭송회 행사를 앞두고 있어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족보를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필자가 아주 어렸을 때 ‘대동보’란 족보를 만드셔서 친척들에게 나눠주는 걸 보았습니다. 가보처럼 간직해오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집안의 어르신인 당숙에게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대여섯 살 어린 손자를 앉히시고 ‘우리는 김해김씨 안경공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필자는 한 가문의 조상과 역사를 아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고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성경에도 족보가 나옵니다. 창세기는 천지 창조부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의 역사를 기록한 거대한 족보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뿌리를 아는 것은 역사를 아는 일이며 정체성과 가치관을 세우는 일입니다.  

 

필자는 한때는 타인의 성씨 내력도 흥미가 있어 중앙일보에서 1998년 발행한 ‘성씨의 고향’이란 ‘한국 성씨 대백과’ 책을 당시는 거금이었을 9만 원이나 주고 사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습니다. 핵가족, 일인가족, 정보화 시대, 인공지능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호주제가 폐지되고 부의 성만 따르던 전통도 모의 성도 따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다문화 가정도 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상들에 대한 애착이나 공경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장 문화가 대세이니 앞으로는 부모님 산소도 없어질 듯하고 성묘조차도 사라질 것입니다.  

보내온 족보 책을 볼 때마다 부담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전통을 중시하고 뜻이 있다고 하여 가승보(家乘譜)도 아닌 일반 족보 책을 자식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습니다. 필자 자신도 그 두꺼운 책을 곁에 두고 있을 형편도 못 됩니다. 아내는 방 무너진다고 야단입니다. 이젠 책을 둘 공간도 없습니다. 매일 쌓이는 게 책입니다. 몇 번 필요한 분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김해김씨 족보를 남에게 주기도 그렇고 더욱이 고물상에 넘기기도 부담스럽습니다. 남 주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그렇고, 보관하기도 그렇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족보 책이 정말로 계륵 같은 존재였습니다.  

 

족보 대금을 보내라는 독촉 문자가 계속 떠올라 심란했습니다. 의뢰하지도 않고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책을 보내 놓고 독촉하는 문자를 보는 순간, 책을 반송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화했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카톡에 보내온 전화번호에 반송한다는 문자를 보내고 우체국에 가서 택배로 보냈습니다. 

 

족보를 사서 양반 행세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참으로 세상 많이 변했습니다. 요새는 족보를 만들어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좋은 뜻으로 보내준 책을 반송하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어쩐지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애꿎게 시대를 탓해 봅니다./목사·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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